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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是你^2011┇评论┫110531 安重根,牺牲美学的悖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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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牺牲美学的悖论


1楼2012-05-06 04:28回复
    是一篇相当长的评论
    其实这是一篇对安重根的评论
    因为欣赏《我是你》,所以也想了解那时期的历史背景
    有兴趣的JMS不妨看看...不过只有电脑翻译


    2楼2012-05-06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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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당시 쏜 일곱 발의 총성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그러나 고전적 영웅설화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안중근의 역사적 무게감에 짓눌려 위인전 속의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의 이미지를 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뮤지컬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좋은 드라마의 핵심요소로 뽑았던 ‘발견’과 ‘반전’이 빠져있습니다. 안중근의 안티고니스트로 부각시킨 이토 히로부미가 오히려 인간미 넘치는 인물로 형상화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토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여주인공 설리가 무의미한 자살을 택하는 장면에선 일본 군국주의의 ‘죽음의 미학’에 포섭된 거 아니냐는 탄식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4楼2012-05-06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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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작품은 그해 11월 국내 초연된 연극 <겨울꽃>이었습니다. 일본 극작가 가네시다 다츠오의 원작을 토대로 한 이 연극은 당시 80석밖에 안되는 초라한 극장에서 공연됐습니다. 하지만 한국공연계 전체를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안중근 거사의 진정한 의미를 ‘반전’을 통해 ‘발견’해내는 미학적 성취를 보여줬습니다.
        이 작품은 안중근이 쏜 총탄 중 이토에게 명중된 세 발의 총성소리에 초점을 맞춥니다. ‘쾅, 쾅쾅’하고 들리는 이 소리는 일본인들에게 죽음의 소리로서 불안과 공포를 야기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안중근이 어머니 뱃속에서 들은 심장 박동소리, 곧 생명의 소리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안중근 의거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근대일본을 사로잡았던 ‘죽음의 윤리’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생명의 윤리’를 새로 쓰기 위한 역설의 저항이었음이.


        5楼2012-05-06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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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의 대중적 성공과 별개로 이러한 미학적 깊이의 차이가 필자를 괴롭혔습니다. 안중근을 영웅으로 기리는 쪽의 작품이 어떻게 그의 손에 영웅을 잃은 쪽의 작품보다 더 깊은 성취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즈음에 세 번째 작품으로서 연극 <나는 너다>를 만났습니다.
          2010년 7월 국립극장 KB하늘극장에서 첫 선을 보인 이 작품은 바로 그런 미학적 간극을 메워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런 간극을 초래하게 만든 우리들의 집단죄의식을 제대로 응시하게 해 준 귀중한 작품이었습니다.
          연극은 뮤지컬 <영웅>과 달리 안중근의 빛 보다는 그림자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바로 안중근의 아들 준생입니다. 그는 안중근이란 영웅의 아킬레스건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비가 목숨을 걸고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의 후손에게 사죄를 하고 돈까지 받은 민족반역자입니다. 어린 시절엔 일제 밀정이 준 독이 뭍은 과자를 받아와 형 분도를 아홉 살 나이에 죽게 한 장본인입니다. 그 결과 영웅의 유일한 후사(后嗣)가 됐지만 오히려 가문과 민족의 수치로서 망각의 늪에 버려진 ‘역사적 사생아’입니다.


          6楼2012-05-0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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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은 그런 저주받은 존재를 구천을 떠도는 허깨비로 불러냅니다. 1막에서 연해주 또는 만주로 보이는 허허벌판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 가운데 준생(송일국)은 죽어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에 계속 쫓깁니다. 아비를 욕보이고 민족을 배반했다는 주홍글씨는 그의 영혼 깊숙이 새겨졌습니다.
            아버지 시신이 100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고국에 안장되지 못하고 아직도 만리타국을 떠도는 탓일까요. 준생의 할머니 조마리아(박정자)와 어머니 김아려(배혜선)의 혼령도 여전히 구천을 떠돕니다. 하지만 그들도 준생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아니 외면합니다.


            7楼2012-05-0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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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복을 입은 코러스는 ‘범 같은 아비 밑에 개 같은 자식’이란 뜻의 ‘호부견자(虎父犬子)’와 ‘친일파, 변절자, 배신자’를 주문처럼 외우며 그런 준생을 핍박합니다. 오로지 지킴이(한명구)만이 “영웅의 아들도 영웅이어야만 했는가”라며 안타까워할 뿐입니다.
              준생은 “스스로 택한 것도 아니었는데 안중근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쓰고 바람 속을 떠돌 수밖에 없었다”며 “잘못된 시대에 잘못 태어나 운명의 고삐를 놓쳤다”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캄캄한 어둠 속에 아들을 묻었다”하고 할머니는 “가거라. 다시는 환한 데로 나오지 마라”며 그를 내칩니다.


              8楼2012-05-0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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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지켜보는 관객은 불편합니다. 대부분은 준생이란 인물이 존재했던 사실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못 봐야할 것을 본 사람처럼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알았다 해도 코러스와 마찬가지로 그를 민족의 치욕이라며 등 돌리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연극은 왜 그 불편한 존재와 대면을 시키는 걸까요?
                한바탕 바람이 불고 2막이 시작되면 1막에서 준생 역으로 출연했던 송일국 씨가 이번엔 안중근으로 변신해 등장합니다. 그는 일제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 일본군 포로를 학살하려는 독립군 동지들을 “나를 지키고 이웃을 지키며 적마저 지키며 살리는 것이 우리 배달족의 도리”라고 설득합니다. 이어 단지동맹과 하얼빈에서 이토 저격 그리고 뤼순감옥에서 재판과정에서 시종일관 조선과 일본의 상생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겠다는 뜻을 피력합니다.


                9楼2012-05-06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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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막에서 숨 죽였던 관객들은 2막의 익숙한 이야기에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낍니다. 장면 장면마다 거침없이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특히 일본법에 의지해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안중근에게 어머니 조마리아가 “항소하지 말거라. 목숨을 구걸하지 말거라”며 작별을 고하는 장면에서 가장 큰 박수가 터졌습니다. 김아려 여사가 손수 지은 옷을 남편에게 입혀주며 “당신 위해 오늘은 한 벌 옷을 짓고 단신 위해 내일은 한 독의 술을 빚겠습니다. 진달래 흐드러진 봄 들판에서 우리 기쁨을 마실 날을 기다리겠습니다”라는 대사를 읊을 때는 눈물을 훔치는 관객이 많았습니다.


                  10楼2012-05-06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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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3막에서 관객은 1막의 견자(犬子)와 2막의 호부(虎父)가 대면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면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서게 될까요? 1막에서 준생이란 ‘발견’이 있었다면 3막에선 마땅히 그에 걸맞은 ‘반전’이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범 같은 아비의 준엄한 질책에 개 같은 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는 뻔한 결말로는 그런 반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11楼2012-05-06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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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막은 1막과 수미쌍관의 구조를 이룹니다. 까마귀 떼를 연상시키는 코러스는 비에 젖은 생쥐 같은 준생에게 모진 비난의 융단폭격을 퍼붓습니다. 생쥐의 저항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버지는 영웅이 되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늑대우리에 던져졌을 뿐이었어. 일본사람들에게 아첨을 하던 사죄를 하던 네 발로 기어가던 나는 내 목숨을 지켜야했어.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살아남은 게 잘못인가요?” 악에 바친 그는 “나는 죽을 수도 잠들 수도 없어. 분하고 야속해서…후회스럽고 부끄러워서…”라며 아비를 향해 독한 원망을 꺼내놓습니다.


                      12楼2012-05-06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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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원망은 크게 세 개의 질문으로 구성됩니다. “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는가”,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그까짓 나라와 민족이 뭐 길래”입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유효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준생은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6.25전쟁 와중에 부산 피난지에서 홀로 쓸쓸하게 숨을 거뒀습니다. 그를 친일파 변절자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을 압니다. 아니 안다고 생각합니다.


                        13楼2012-05-0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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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질문에 대한 답은 동양평화를 위해서이고, 두 번째 답은 대한국인 안중근(大韩国人 安重根)이고, 세 번째 답은 “이로움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목숨을 바쳐야한다(见利思义 见危授命)”입니다.
                          이 지점에서 준생의 혼령을 쫓아다니던 검은 그림자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죽음의 사신(死神)이 아니라 아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억제하지 못하는 아비 안중근의 혼령입니다. 바로 연극 ‘겨울꽃’에서 ‘쾅, 쾅쾅’이란 소리를 연상시키는 극적 반전이 펼쳐지는 순간입니다.


                          14楼2012-05-0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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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영혼이 들려주는 답은 우리의 예상답변과 사뭇 다릅니다. 2차대전 종전 후 산업화와 민주화에 동시에 성공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자 스포츠강국을 이끌게 될 대~한민국의 잘난 후손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외세의 횡포에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했던 자신의 아들처럼 못나고 비루한 이들을 위해서입니다.


                            15楼2012-05-0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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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순간 안중근이 핍박받는 겨레를 위해 희생의 제물로 받친 것이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라는 것이 뚜렷해집니다. 목숨보다 귀한 아들을 포함한 가족을 함께 희생한 것입니다. 결국 친일파 변절자 배신자로밖에 살 수 없었던 준생이야말로 안중근이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간 십자가가 아니었을까요? 안중근이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죄 많은 인간을 사랑했기에 그들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마저 희생시켰던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 실천한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16楼2012-05-0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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